May 6,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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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에 만나는 사람들은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을까?

Apr 10,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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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 그리 좋지 않다. 그리 나쁘지도 않다. 4월 10일 목요일 오후 4시 7분.
머리 속에서는 많은 것들이 스쳐지나간다. 쉬는 수요일 끝없이 꿈을 꾸었다. 꿈에서
깨어나보면 아무도 없다는 것이 스쳐지나지만,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 사진을 시작하게 된
이후로 더욱 더 현실적으로 변해가는 것 같다. 현실적이라는 말은 곧 나쁘지만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믿고 싶은게 지금이다.

어제는 비가 왔다. 나는 잠을 자면서도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 걱정 아닌 걱정과
고민을 해야한 나이에 접어들고 있다.
마음속에 움직이고 있는 그것이 이끌어줄지 아니면,
모르겠다. 정답이 없다는게 삶에는 정답이 없다는게 가장 두렵기도 하고
어려운 문제이다. 부딪히고 멀어지는 모든것들이 쉽지만은 않다.

뜻대로 움직이는것과 생각하고 계획한대로 실천에 옮길수 있다는 것은
누구에게 해당하는 사항일지.
시간은 끊임없이 흐르고 충족되지 못한 그러한 것들은 충족 시켜달라
요청을 하고 있지만, 그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즐겁지 않다.
여러번 지우고 다시 쓰고 다시 생각하고 다시 마음을 다 잡고,
다시금 찍고 다시금 삭제하고 반복되는 흐름에서 무엇을 놓치고
무엇을 얻을수 있는 것인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Mar 18, 2008

박평종 VS 이영준

기획대담 - 박평종, 이영준의 논쟁을 마치며

기획대담

박평종, 이영준의 논쟁을 마치며

한국작가의 유형학 작업을 비평한 <수용의 규범>에 관해 ‘사진읽기’ 필자인 박평종과 이영준이 지난호까지 세번의 반론을 서로 주고받았다. 예술작품의 상품논리에서 제대로 된 유형학 작업의 존재여부, 반인간주의와 주체의 시각 등에 걸쳐 두 비평가는 당대 한국사진과 작가를 사례로 놓고 깊이 있는 비평 논쟁을 펼쳤다. 이번호에는 이번 논쟁을 마무리하는 의미에서 ‘의미의 경쟁’ 역자로 유명한 김우룡의 사회로, 두 비평가의 대담을 싣는다. 4개월여간 이어져온 두 비평가의 논쟁은 그동안 한국사진에서 거의 전무했던 비평문화에 활력을 불어넣으며 이후 보다 발전적인 비평과 논쟁을 생산하는 길을 여는 동시에 독자들에게 한층 수준 높은 읽을거리를 제공해왔다. 지면을 빌어 대담 참가자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편집자>
획일화의 우려, 패러다임의 변화

김우룡 ▶ 이번 논쟁이 굉장히 시의적절했고, 한국사진에 어떤 식으로든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논쟁에 임해준 이영준, 박평종 두 분에게 먼저 감사드립니다. 우선 두 분에게 글의 내용이 아닌 글을 쓰게 된 기본 문제의식이랄까, 동기를 듣고 싶습니다. 박선생님은 월간사진에 사진읽기 연재를 하고 계신데, 어떤 바람을 갖고 연재글을 쓰게 되었는지부터 말씀해주시죠.
박평종 ▷ 사진읽기 연재를 하기 전에 한국의 고전 작가들의 작품집을 소개하는 연재를 했고 더 이상 다룰만한 작품집이 없어지면서는 현재 활동 중인 작가들에 대한 자유로운 글쓰기를 시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작품집에 관해 쓰기에는 섣부르다는 생각에 현상 자체에 대한 적극적인 발언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가장 먼저 일제시대 이래로 한국사진이 서구로부터 계속해서 받아온 영향에 주목하게 되었지만 이는 장시간의 치밀한 아카이브적인 연구가 필요한 분석이라 잡지에 쓰는 비평보다는 차분한 연구가 더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동시대 작업 그중에서도 유형학 작업을 하는 작가들을 <수용의 규범>이라는 제목으로 다뤘습니다. 글에서 언급한 작가들이 유형학을 대표하는 작가인지 그리고 거론되지 않은 다른 작가들에 대해서는 좀더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이들이 한국사회에서 가장 성실하게 작업하는 작가들이며 제 스스로 애정을 가진 작가들이라 더 네거티브한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또 하나는 유형학 작업이 한국사진에 급속히 퍼지면서 맹목적인 모방으로까지 나타나는 경향을 보면서 문제제기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여기에 이영준 선생님께서 참여해주셔서 더욱 생산적인 논쟁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김우룡 ▶ 애정을 갖고 받아들이되 더 나은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박평종 선생님의 글쓰기가 시작되었던 것 같습니다. 두 차례 오고간 반론, 재반론 공방을 책으로 보면서 사실 좀 놀랐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읽고 반론하는 분이 있구나.(웃음) 이선생님은 박선생님의 글을 보고 먼저 가슴 속에서 부딪히는 뭔가가 있었을 것 같은데 그 느낌부터 말씀해주시죠.
이영준 ▷ 네, 믿기 어렵겠지만 제가 반론을 쓰거나 제 글에 반론을 받아보긴 이번이 처음입니다. 사진평론이라고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한 지는 88년부터인데 당시는 민중미술과 모더니즘 양 진영으로 나뉘어 저쪽에서 대포를 한 번 쏘면 이쪽에서 응사하는 식이어서 처음 글을 쓰게 된 동기에 반발심도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그동안 사진평론의 문제는 약간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제가 반발할만한 평론다운 글이 없었다는 겁니다. 범주적으로 평론에 들지도 않는 애매한 감상문 수준의 글을 가지고 평론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평론이 아니므로 좋다 나쁘다 대꾸할 말이 없었는가 하면, 어떤 글은 너무 난해해 단 한마디도 알아볼 수 없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나마 알아볼 수 있고 평론의 범주에 해당하는 글은 제 입장이랑 너무 달라 논쟁이 성립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20년이 지난 2007년에서야 대꾸할만한 글이 나와 처음 박선생님 글을 보고는 반가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아주 축하할만한 일이면서 기왕이면 서로가 맞서 불꽃이 튀어야지 평론가에게는 커다란 에너지가, 독자에게는 볼거리가 그리고 비평적인 범주를 너무 쉽게 쓰곤 하는 요즘 작가에게는 나태한 정신을 깨우는 효과가 있지 않을까 해서 반론을 쓰게 되었습니다.
김우룡 ▶ 두 분이 글을 쓰게 된 기분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출발점은 비슷한 것 같은데요. 아닌가요?
이영준 ▷ 차이라면 박선생님은 미학에서, 저는 미학을 떠난 입장에서 고민하다보니 관점의 차이 같은 게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시각문화현상으로서의 사진에 관심이 있지 예술이라는 특권으로 대접받는 예술사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박선생님 글에서 언급된 작가들이 바로 사진의 범주 안이 아닌 바깥의 시각문화에 반응하면서 기존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려는 이들인데, 이 점에서 박선생님과 약간 다른 것 같습니다.
박평종 ▷ 한국사진의 전통에서 벗어나고 있어 고무적이라고 하셨는데, 이들이 전통과 두고 있는 거리, 즉 어느 정도 벗어나 있다고 보십니까?
이영준 ▷ 먼저 전통이라고까지 할 게 있는지부터가 회의적인데요. 전통보다는 그간에 이래저래 형성된 패러다임이라고 보는 게 맞지 않을까요. 저의 경우 사진학과 출신이 아니다보니 사진학과 출신보다 한국의 사진 관행을 더 모를 수도 더 잘 알 수도 있는 양면을 모두 가집니다. 이론강의만 해서 사진학과 내에서 실기교육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뤄지는지 직접 경험하지는 못했지만 바깥에서 보거나 전해들은 얘기를 종합해보면 문제점이 보입니다. 그 중 하나가 도제식 교육입니다. 물론 지금이야 많이 없어졌지만 불과 10년 전만 해도 이러한 도제식 교육의 영향을 받은 제 또래의 사진가들은 기존의 패러다임을 변화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중 가장 표본으로 삼을만한 말이 ‘사진은 사진이다’라는 전시 타이틀인데요. ‘사진은 사진이다’는 모든 시각조형의 논리가 그 안에서 모두 이뤄진다는 모더니즘적인 논리인데, 문제는 다들 아시다시피 한국에서 제대로 된 모더니즘 논리가 없지 않았습니까. 지금까지 한국사진에서 모더니즘의 장이 한번도 없었다는 겁니다. 모더니즘은 합리적이어야 하나 한국의 전시나 전시장 운영은 비합리적인 것투성이에다 사이비 모더니즘에 의해 ‘사진은 사진이다’라는 순수성에 갇혀 사진만 해야 하고 미술로 눈 못 돌리는 게 하는 협박성의 강요로 사진가의 손발이 오그라들어 있다는 느낌을 상당히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요즘 사진가들은 이러한 논리로부터 벗어나고 있는 듯합니다. 하나 예를 들면 90년대만 해도 사진학과 대학원생까지 들판에 나가 이전 세대와 똑같이 안개 끼고 고즈넉한 풍경을 찍었고 이러한 사진으로 전시를 가진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러한 풍경사진을 안 찍습니다. 뭐냐면 풍경을 바라보는 자신의 주체설정과 정체성이 많이 변했다는 거죠. 따라서 작가로서 위상설정과 대상과의 위상설정도 같이 변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 이전에 사진에서 수용 않던 이질적인 감각들이 수용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하나는 교육의 변화이고 또 하나는 풍경을 예로 든 작가에서처럼 주체의 지위나 대상과의 관계설정의 변화입니다.
반인간주의와 주체

김우룡 ▶ 공감합니다. 두 분 사이에 오고간 반론과 재반론 글을 보면서 텍스트의 정교함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았습니다. 텍스트의 켜나 층에서 논의가 연동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좋은 텍스트가 많이 나와야 하며 텍스트의 시작은 글쓰기이므로 엄정한 글쓰기가 이뤄져야 할 것 같습니다. 부족한 독서력으로 판단컨대 두 분 사이에 오고간 글의 쟁점은 ‘주체-반인간주의, 상품-예술작품, 심미성-예술행위, 유형학의 성립요건-개념사진과의 구분, 사진 안의 인간과 풍경의 의미, 당대 한국사진을 보는 눈’ 등 여섯 지점에 있다고 보입니다. 다들 굉장한 개념어지만 다루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첫 번째 쟁점과 관련해 박선생님의 글 <수용의 규범> 2편에서 쓰신 “하지만 반인간주의가 널리 확산되는 동안 어느 틈엔가 의미는 희석되어 비판이론의 장식적 요소처럼 되고 말았다. 유형학적 사진에서 인간이 배제된 모습을 반인간주의의 양태로 읽는다면 지나친 확대해석일까?”(월간사진 7월호)에서 언급된 ‘반인간주의와 주체’ 개념을 어느 켜에서 얘기하는 것인지 모더니즘 쪽의 개념인지 아니면 자크 데리다에서 나온 것인지부터 말씀해주시죠.
박평종 ▷ 재반론 글에서 적었듯이 사실 커다란 의미를 지니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 문제를 언급했던 이유는 우리 작가들의 너무 관념적으로 서구의 비판이론을 배워와 자기 작업에 적용시키려다보니 반인간주의라는 비판이론까지 장식적인 요소로 사용하지는 않은지 혐의를 두었기 때문입니다. 이선생님이 글에서 언급하셨듯이 반인간주의라는 개념적인 장치를 제가 올바로 사용 못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부언하자면 인간주의 앞에 붙는 접두사 ‘반’은 ‘Anti’(안티)의 의미를 가집니다. 사실 반인간주의 개념은 워낙 크기 때문에 철학자마다 용래가 굉장히 다릅니다. 예컨대 알뛰세는 과학주의에 대한 반대 즉 마르크스를 해석할 때 유물사관을 과학이 아니라 인간주의로 해석한 것에 대한 반대급부로 반인간주의를 내왔지 않습니까.
이영준 ▷ 그 경우 탈인간주의가 맞지 않을까요? 해석에서 인간이라는 요소를 뺀다는.
박평종 ▷ 휴머니즘이라는 것이 지나치게 유물사관 해석에서 문제가 되면서 결국 안티까지 나가야 극복될 수 있다고 보았던 거죠. 그래서 알뛰세까지는 안티로 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글에서는 알뛰세까지 멀리 나간 건 아니며 비평단어로서 한정시키지 못한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영준 ▷ 제가 오해하고 반론한 건 아닌지 여전히 의문이 남는 대목은 “사진에서 인간이 배제된 모습을 반인간주의의 양태로 읽는다면 지나친 확대해석일까?”인데요. 이 대목이 사진에서 인간이 안 나타난다고 반인간주의(안티 휴머니즘)라고 할 수 있는지 묻겠습니다.
김우룡 ▶ 이 질문은 다섯 번째 쟁점인 ‘사진 안의 인간과 풍경의 의미’와도 맞닿습니다.
박평종 ▷ 작가들이 서양사진이나 이론의 텍스트를 깊이 읽지 않고 피상적으로 작업에 적용한다는 혐의가 제 글의 모든 출발점이었습니다. 혹시 서양이론을 가져와 사용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피상적으로 가져다쓴 게 아닌지라는 생각을 한편으로 했었습니다. 반인간주의라는 것도 포스트모더니즘과 더불어 유행이 되었던 것이고요. 반인간주의라는 비판이론을 피상적으로 사진에 끌어들여 장식적으로 사용한 건 아닌지에 대한 가벼운 의심 정도였습니다.
김우룡 ▶ 단순화시켜 물으면 박선생님은 사진에 인간이 들어가면 인간적이고 안 들어가면 반인간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단어 자체가 지닌 질량이나 무게가 아무리 중립적이더라도 사람에 의해 쓰이게 되면 아주 미세하게라도 쓰는 사람의 호불호가 담기기 마련인데요. 글의 문맥에서 보면 반인간주의를 약간은 부정적으로 보신 것 같은데요. 오독인가요?
박평종 ▷ 인간이 들어간 사진이 더 인간적인지 아닌지에 대한 제 판단은 아주 중립적입니다. 그리고 문맥에서 커다란 뜻이 없기 때문에 호불호도 없다고 봐야죠. 단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죠. 예를 들어 ‘인간가족’(The Family of Man)전과 같은 전시가 사진에서 휴머니즘을 극단적으로 과장시키고 확대 포장했다고 하면 이때의 휴머니즘은 싫죠.(웃음)
이영준 ▷ 그렇죠, 저 역시 싫어요.(웃음) 저는 반론글에서 인간배제와 반인간주의는 전혀 별개라고 썼는데요. 여기서 반인간주의가 어떤 레벨에서의 반인간주의며, 반인간주의와 사진에서 인간이 등장하지 않는 것과의 연관에 대한 의문제기였습니다. 반인간주의는 여러 레벨에서 얘기될 수 있는데요. 사진의 소재로서 등장하는 것인지 작가가 누구라고 보는 것인지 아니면 감상하는 입장이 누구인지 즉 인간인지 제도인지 이데올르기인지 주체인지 타자인지 등.
박평종 ▷ 원칙적으로는 반인간주의와 사진에서 인간이 등장하지 않는 것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유형학 작업과 주체나 반인간주의는 큰 관련이 없는 주제이기 때문이죠.
유형학? 유형학적?
김우룡 ▶ 글을 보면서 ‘유형학 사진에 대한 인식 층위’가 두 분이 약간 다르다고 느꼈습니다. 먼저 박선생님에게 질문하면, 사진사적으로 1962년 에드 루샤 이후부터의 포스트모더니즘 사진과 유형학 사진 그리고 여기에서 더 나가서 아카이브 사진까지 같이 얘기했을 때 주체의 개념 내지는 해체의 개념과는 관계가 어떻습니까? 관계가 없나요?
박평종 ▷ 관계가 없지는 않다고 봅니다. 실제적인 논의를 위해 가장 먼저 주체의 문제부터 얘기하자면, 먼저 유형학 사진은 대상 중심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식의 체계구축이라는 점에서 주체의 시각이 들어가겠지만 형식적인 면에서 보자면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기존의 시각예술에 비해 작가의 시각이 가급적 배제되어 있지 않습니까. 다시 말해 대상이 스스로 드러내 보이도록 하는 거죠. 이런 점에서 대상 중심적이라고 말할 수 있고, 다음으로는 칸트의 미학이론에서 예술을 바라보는 미학적 주체의 쾌와 불쾌, 만족과 불만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유형학 사진은 설 자리가 없어지죠. 주체의 시각이 빠져나간 유형학은 중립적이며 관객 입장에서는 미적체험의 최소화, 심지어 무감동까지 나갈 수 있어요. 이런 점에서 유형학 사진은 대상과 주체의 기존 관계를 새롭게 바라보는 계기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영준 ▷ 유형학적 사진의 특징을 ‘정면성, 중립성, 대표성’ 세 가지로 규정한 박선생님 글에 반론을 제기하면서 예로 든 작가들은 유형학 작업을 하는 작가들이 아니라고 했는데요. 박선생님이 얘기한 특징은 유형학의 형식적인 면일 뿐 본질을 보아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유형학의 특징은 통계적 진실인데, 즉 특정한 카테고리 내의 지식을 몽땅 다, 단 하나의 예외 없이 포괄해야 하는 거죠. 물론 이것의 가능 여부는 별개입니다. 유형학의 방법을 사진에 쓸 경우 첫째로 따져야 하는 것은 어떤 지식의 체계가 전제되어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 다음으로는 그 지식분야의 대상을 어떤 체계로 분류하고 얼마나 철저하게 포괄했는지를 따져야 합니다. 특정 카테고리의 대상 30여개 정도만 찍고서 유형학 전시라고 이름 붙이는 건 자격조건에도 미달이며 전혀 유형학적이지도 않습니다.
박평종 ▷ 그렇습니다. 대상이 스스로 드러낸다는 건 순진한 믿음이며 완벽한 진실성도 불가능합니다. 이선생님 글에서 반주체(탈주체)도 주체의 한 속성이라는 부분에 공감합니다. 대상이 객관적으로 드러낸다고 해도 여기에 주체의 시각이 안 들어갈 수 없고, 이선생님은 이것을 수사라고 말씀하셨듯이 수사 없는 사진은 없습니다. 증명사진에도 촬영자의 시각, 수사가 들어가듯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대상 스스로 드러낸다는 것은 허구이며, 주체도 대상과의 관계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주체나 탈주체도 허구적인 개념이라고 봅니다.
김우룡 ▶ 관계라는 말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주체가 있고 없다는 것보다는 주체가 어떤 힘을 갖고 타자로서 대하고 자기 쪽으로 다른 것을 끌어당기려다보니 문제가 되어 여기서 해체나 탈주체 개념이 나온 것 같습니다. 이른바 ‘There From’이 아니라 ‘There In’으로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바뀌면서 휴머니즘이 인본주의가 아니라 탈인간주의로 해석이 달라지는 점에 저는 주목했습니다. 여기에 두 분의 생각이 어떤지 의문이 들었고 그래서 논의 중에 반인간주의라는 단어가 나와 반가웠습니다. 하지만 주체나 대상 모두가 허구일 수밖에 없는데, 즉 푸코의 말처럼 반인간성의 폐해 때문에 반인간이 나온 게 아니라 인간성 때문에 반인간이 나왔다는 거 아닙니까. 이러한 인간 중심적인 사고의 반성에서 포스트모더즘이 나왔듯이 유형학이라는 사진행위도 이를 통해 우리 삶이 좀더 풍성해지는 방향으로 오늘 논의가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우선 유형학적이라는 표현 사용까지 지나치게 제한을 두는 것에 관해 묻고 싶습니다. 한 대상을 6천장 찍은 칼 블로스펠트도 후대의 호사가들이 유형학에 포함시켰고, 진행형으로 아카이브가 축적되듯이 유형학도 그런 과정으로 볼 수는 없는지?
이영준 ▷ 베허를 포함해 자기 스스로 유형학 사진가라고 지칭한 이는 한 명도 없습니다. 현재 언급된 작가들도 30~40장으로 한 시리즈가 끝나기 때문에 아카이브 축적을 목표로 한다고 볼 수는 없죠.
박평종 ▷ 워커 에반스가 한 인터뷰에서 다큐멘터리 스타일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는데요. 그 의미는 ‘도큐멘트 즉 기록은 예술사진이 아니다. 예술사진 역시 단순한 기록(도큐멘트)이 아니다. 하지만 예술사진에 도큐멘트라는 형식을 끌어와 쓸 수는 있다’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도큐멘트와 다큐멘터리적이라는 명사와 형용사가 갖는 의미를 유형학에도 똑같이 적용해 ‘유형학적 형식’ 정도로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우룡 ▶ 이 자리에 오기 전에 사진사를 다룬 책 6권에서 유형학(Typology) 단어를 찾아보았지만 1~2군데 빼고는 언급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유형학적이라는 사진을 부정하지는 못할 것 같은데요.
이영준 ▷ 전 유형학적 사진이라고 했을 때 사진 자체의 형식(Form)으로 말하기보다는 전체 체계 즉 포맷(Format)으로 봐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이 지점이 미학자로서 보는 박선생님과 미학자가 아닌 저 사이의 차이이기도 하고요. 포맷이라고 봤을 때는 텍스트와 유형학적 체계가 생산하는 지식의 체계를 같이 다뤄야 하는데 그렇지 않기 때문에 유형학적이지도 않다고 보는 것이죠. 범주가 다른 전혀 별개의 물건이라는 거죠.
김우룡 ▶ 역사를 거꾸로 접더라도 현재의 작가들 작업을 유형학이라고 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차라리 수집 내지는 일련의 시리즈로 기능하는 작업을 했던 80년대의 개념사진가나 뉴포토그래피 사진가에 더 가까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런 점에서 토마스 루퍼나 안드레아 구르스키는 유형학 범주에 전혀 들지 않으며 베허도 초창기 사진에만 유형학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술작품과 상품논리
김우룡 ▶ 다음으로 ‘상품과 예술작품’ 논쟁으로 넘어가죠. 상당히 고전적인 주제인데요.
이영준 ▷ 상품의 개념까지 이 자리에서 논의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뛰어난 디지털 C프린트와 대형인화, 디아섹(Diasec) 액자 등으로 정형화되어 있다. 예술작품을 상품처럼 다루는 현상을 문제 삼을 이유는 없지만, 작가들이 상품 논리 혹은 시장 논리에 따라가는 모습”(박평종, 월간사진 7월호)에 관해서만 얘기하면 되지 않을까요? 사실 상품논리에 지나치다 싶게 쫓아가려는 일부 작가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글에서 예로 든 작가는 이 경우가 아닌 것 같습니다.
박평종 ▷ 맞습니다. 문장마다 정당성을 일일이 제시해야 하는 논문과 달리 잡지 비평은 인용이나 글쓰기에서 상대적으로 더 자유롭기 때문에 최봉림선생의 글을 인용하면서 그렇게 해석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미 원산지인 독일에서도 보존성 문제로 거의 사용되지 않는 디아섹을 은염프린트물에까지 사용하는 등 맹목적으로 따라가려는 경향을 얘기하려던 것이었습니다. 물론 작품을 팔려고 노력하는 것 그리고 인정받는 작업의 경향 즉 장의 논리를 따라가 들이는 수고를 줄이려는 것 자체를 뭐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단 그 모습이 한두 작가가 아니라 집단적으로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한편으론 이처럼 형식이나 경향이 비슷하다면 뒤셀도르프 스쿨이나 에꼴 드 뉴욕처럼 화파 중심으로 모여 기치를 내걸고 활동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영준 ▷ 박선생님의 우려에 공감합니다. 현재 우리 작가들이 워낙 개별화되어 있어 학파나 운동 등 집단적인 움직임으로 나오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나 더 덧붙이자면 장의 논리 안에서 작가 개개인의 개성이 사라진다는 점이 박선생님 비판의 한 축이었는데요. 제 생각에는 우선 개성이 다 다르다고 봅니다. 평론의 목적도 미세한 작가 개개인을 돋보기 들여다보듯 확대해 보면서 그 차이를 읽고 밝히는 게 아닐까 싶네요. 하나로 뭉뚱그려 보는 건 무리한 논리라는 이런 생각입니다.
박평종 ▷ 그 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향후 저 스스로 이 작가들의 작업에 대한 정당성이 들면 아마 달라질 수 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잘 모르겠다는 말씀을.
이영준 ▷ 시대가 주는 과제인 것도 같아요. 이전에 한번 외국작가와 똑같은 작업을 국내작가가 해서 문제가 되고 공청회가 열린 적도 있었는데요. 그 작가는 외국작가의 작업을 본 적이 없다는 겁니다.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고요. 유사한 사례를 더 보면서 이렇게 똑같이 나올 수 있는 이유 중 하나가 너무 많은 이미지를 보다보니 자기가 보고서도 잊는다는 겁니다. 좋게 말해 이 시대의 패러다임이라지만 남들 쫓아 버스 타는 셈이거든요. 자기도 모르고 따라가는 이러한 작가에 대해 채찍질하고 차별화시키는 게 평론의 목표가 아닌가 생각하고 서로에 대해 더욱 치열해질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예술행위와 심미성
김우룡 ▶ 다음 ‘심미성-예술행위’로 옮겨가서, 이선생님은 반론에서 “심미성이란 개념은 오늘날 시각예술에서 폐기처분한지 오래 되는 개념”(월간사진 9월호)이라고 하셨고, 박선생님은 재반론에서 “나는 오히려 오늘날 시각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가 바로 이 ‘심미성’의 문제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현대의 미학논의에서 가장 적극적이고도 진지하게 다루고 있는 주제가 바로 ‘심미성’에 관한 것이다”(월간사진 10월호)라고 쓰셨습니다.
박평종 ▷ 이선생님의 반론을 보면서 심미성에 대한 용어 사용법만 다르지 생각은 같다는 걸 알았습니다.
이영준 ▷ 저 역시 박선생님의 글을 보면서 용어 사용범위가 저보다 더 넓다는 걸 알았습니다. 저는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단 예로 든 작가들이 심미성에 관심 있는 작가는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싶고 또한 박선생님 글을 읽으면서는 심미성이 아예 없을 수는 없겠다는 걸 알았습니다. 사진을 찍을 때 감각적인 배치라든지 이런 걸 아예 생각 않을 수 없는 것처럼요. 단 이게 핵심 범주는 아니죠. 박선생님의 심미성에는 추함이나 기괴함, 윤리학 이런 것까지 모두 포함되는 것이죠?
박평종 ▷ 그렇죠. 사실 심미성을 어디까지 확장시킬지 고민인데요. 하이데거는 진리의 문제까지 포함시켰고 이것은 원래 그리스인이 생각한 미의 개념과 맞닿거든요. 더 복잡하게는 지와 존재의 문제까지 나오는….
이영준 ▷ 중요하고 어려운 문제가 뭐냐면 사실 인간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건 좋고 해야 되는 것이지만 세상이 하도 혼탁해지니까 아름다움의 추구를 마치 사치라고 보게 된 거죠. 마땅히 인간과 세상, 예술이 아름다워야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보니 이 과정에서 기괴하고 엽기적인 게 나오고요. 그럼에도 아름다움은 인간이 성숙해지고 완전해지면 도달해야 하는 지점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당대의 현대예술에서는 부분적인 범주에 머물 수밖에 없지 않나는 생각입니다.
박평종 ▷ 미를 형태 중심으로만 생각하는 관행도 짚고 넘어가는 게 좋을 듯합니다. 이것을 축약시켜 형상론이라고 하는데 그 시작은 라틴전통에서였어요. 이 형상론 이전에도 미가 있었고 이때의 미는 형태가 주는 미가 아니라 올바르고 정의롭고 착한 행위 즉 진과 선까지 포함해 굉장히 포괄적인 개념으로 쓰였거든요. 그래서 진선미가 서로 크게 다르지 않았고요. 이처럼 미가 굉장히 폭넓은 개념인데도 예술작품의 미를 형태 중심으로 축소해 보려는 관행이 있었고, 여기서 벗어나려는 게 20세기 이후의 개념작가들의 작업에서 잘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이영준 ▷ 박선생님에게 질문 하나를 던지면, 국내외를 통틀어 심미성을 다루는 작가는 누구라고 보는가요?
박평종 ▷ 다 그렇지 않을까요. 전시장에서 액자 하나 걸면서 높낮이를 모두 신경쓰듯이요.
이영준 ▷ 개념적이든 비판적이든 내용이 앞서는 작가는 제외하고 심미성만을 가운데 두고 작업하는 작가라면요?
박평종 ▷ 그 경우라면 심미성보다는 정형화된 아름다움을 따라가는 작가라는 표현이 더 맞지 않을까요. 미에도 정형화된 규칙이 있고 이 규칙을 따라가는 것처럼요. 살롱사진 심사할 때보면 규칙이 있잖아요. 그 규칙에서 벗어나면 바로 탈락이고. 이렇게 제도화된 살롱의 정형성 외에도 시대적인 또는 공간적인 미의 정형성도 있는 것 같습니다. 서양의 미의 규칙과 기준이 있듯 한국사회에서도 아름다운 사진에 관해 모두가 통념적으로 갖는 기준이 있고 이 기준에 부합하려는 작가가 질문하신 심미성을 가운데 둔 작가라고 할 수 있겠죠.
이영준 ▷ 저는 직접 예술을 다루지는 않지만 예술에 대한 기준만큼은 굉장히 까다로운 편이에요. 어떤 규칙을 따라가려는 순간 바로 탈락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작가의 작품에는 기존의 규칙을 따라가려는 부분과 여기서 이탈하려는 부분이 섞여 있다고 보는데 따라가려는 99%는 예술이 아니며 이탈하려는 1%를 예술이라고 생각해요. 축구선수 호나우두도 90분 내내 잘 하는 게 아니라 85분은 보통선수처럼 뛰지만 골문 앞에서 다른 선수가 못하는 호나우두만의 발재간 이게 있기 때문에 뛰어난 선수라고 하듯이 작가도 자신이 하는 모든 게 예술이 아니라 99%는 따라 하지만 마지막에 보여주는 1% 이게 예술이며, 이게 없으면 예술이라고 할 수 없죠. 많이들 하는 착각 중 하나도 따라하면서 마치 자신이 예술을 한다고 생각하는 거죠.
다시 반인간주의로
김우룡 ▶ 아주 기초적이지만 계속 되풀이되는 이야기 중 하나가 사진 안에 사람이 들어가고 안 들어가고의 문제인데요. 이른바 유형학 사진을 한다고 일컬어지는 작가들의 사진 속에 사람이 없는 이유는 뭐라고 보십니까?
박평종 ▷ 글쎄요. 그 점은 고민을 못해보았는데요. 혹시 수사적인 측면에서 사람이 들어가면 불순물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영준 ▷ 단적으로 안젤 아담스 사진에도 사람이 없어요. 사람을 잡티로 생각한 거죠. 김선생님 번역서에도 나오는 내용인데 이전부터 서양에서는 자연을 처녀라고 생각해 정복의 대상으로 여겼어요. 이런 자연을 찍으러갔는데 다른 사람을 사진에 넣으면 다른 사람이 먼저 그곳을 정복한 게 되기 때문에 배제한 거죠. 정복의 대상인 자연은 깨끗해야 한다, 그래서 사람을 배제했다고도 볼 수 있어요. 그리고 휴머니즘과도 연관되는 게 아닐까요. 서구의 휴머니즘은 데카르트 이후로 인간을 주체로 놓음으로써 인간 중심으로 자연을 보았어요. 그래서 다른 인간은 배제하고 오로지 자기가 주체로서 대상으로 설정할 수 있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배제시켜야 했던 거죠. 사진 속에 다른 사람이 들어가면 주체의 반대가 객체이듯 객체가 되어야 하는데 자기는 객체가 아니거든요. 이게 휴머니즘의 핵심이 아닌가 싶어요. 그리고 오히려 반인간주의 형태라면 인간을 배제하기보다는 허물어진 도시 등 흔적을 남기는 사진이 나왔을 수도 있겠죠.
박평종 ▷ 반인간주의는 굉장히 관념적인 개념이라 형상을 통해 말한다는 건 좀 부적절하다고 보입니다.
이영준 ▷ 그렇죠. 형상을 통해 말할 순 없겠죠. 저는 아직 남는 의문이 박선생님이 쓰신 반인간주의의 레벨과 타깃이 어디인지 정확히 이해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 관념적이지만은 않거든요. 왜냐면 그런 사고가 실제 행위를 이끌어내거든요.
박평종 ▷ 반인간주의를 많이들 전략이라고 해석하지만 전략은 아니에요. 예컨대 반인간주의 용어를 처음 사용한 건 알뛰세였는데 그 이후 고전적인 주체 개념을 문제 삼았던 사람들의 텍스트를 가지고 반인간주의로 해석한 게 영미권의 일반적인 논의였습니다. 이 논의를 했던 당사자들 중에서 자기 작업을 반인간주의라고 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심지어 푸코조차 자기 작업을 반인간주의라고 어디에서도 언급한 것을 못 봤거든요. 단지 이들 작업을 해석한 사람들이 보기에 반인간주의라는 양태가 다분히 보였기 때문에 그러했던 것입니다. 푸코의 경우를 봐도 유형학 사진의 특징에서 보이는 것처럼 푸코라는 주체가 글을 쓰는 게 아니라 즉 주체의 시각을 배제하면서 이미 기술되었던 내용을 가져와 대상이 기술하게 하는 즉 고고학적인 방법을 썼지 않습니까. 그래서 푸코의 작업이 반인간주의라는 이유도 고전적인 주체의 개념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영준 ▷ 오독일 수 있다는 점을 미리 밝히고 말하자면 박선생님은 글에서 인간의 난폭함에서 반인간주의가 나왔다고 보시는 것 같습니다. 푸코가 비판한 것도 인간의 난폭함 등 비인간성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했을 때 인정하고 믿는 그 가치, 즉 선악과 합리성, 효율성 등 인간이기 때문에 좋다는 지점에 대한 철학적인 비판입니다.
박평종 ▷ 주체 개념을 해석하는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에 서구 비판이론가의 작업을 하나로 통합시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 글의 표현이 그렇게 나타난 것 같습니다. 다른 철학가로 바타유는 인간의 폭력성을 근원적인 것으로 보기도 했습니다. 이는 니체와 비슷하죠. 그리고 개념적으로 보면 데리다는 폭력성이라는 것을 물리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주체가 주체로서 나타나는 행위 자체를 폭력으로 보았죠. 언어 자체도 폭력에 기초하고 있다는 즉 타자의 타자성을 지움으로써 언어는 말을 할 수 있는 것, 이는 폭력의 기원으로 볼 수 있고 폭력 없이 언어가 출현할 수 없다는 것이죠. 이처럼 폭력성의 범주가 너무 크기 때문에 글에서 한두 문장으로 설명하기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이영준 ▷ 말씀하신 그런 맥락이 첫번째 글에서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의 폭력성이 전쟁, 살인, 파괴 등으로 읽혀졌던 것 같고 그래서 반론에서 그 내용을 썼었습니다.
한국사진의 전망과 사진비평
김우룡 ▶ 쟁점 논의가 거의 이뤄진 것 같습니다. 하나 더, 당대 한국사진에서 유형학이라는 용어사용에 관해 한 말씀씩 해주시죠.
이영준 ▷ 하려면 제대로 해야 된다는. 서구에선 리서치 베이스라든지 아티스트 리서치라는 말을 하듯이 어떤 현상이든 실제 나가 철저히 조사를 해보라는 겁니다. 자주 피는 담배든 많이 바르는 화장품이든 조사하면서 그 속에서 사진자료를 풍부하게 해석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라는 거죠. 유형학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고 제대로 철저히 하다보면 다른 종류의 예술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입장입니다.
박평종 ▷ 유형학 자체의 문제와 용어의 문제가 있습니다. 유형학은 역사적, 근대적 개념이면서 개인적으로 지금 우리사회에 필요하다고 봅니다. 단지 유형학이 현대에 갑자기 시작된 게 아니므로 우리나라 역사로 따지만 사진이 도입된 19세기 말 이후의 이미지 자료까지 모조리 총괄하는 아카이브 작업이 선행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용어 문제에서는 그 용어가 적절하지 않다면 바꿔나가야겠죠. 물론 한국사회에서 부적절한 용어가 많고 언어로 사용되면서 그 자격을 얻기 때문에 쉽지는 않겠지만.
김우룡 ▶ 확산시켜 가능성을 열어야 되거나 모자란 지점들이 많이 언급된 것 같습니다. 젊은 작가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으로 정리하겠습니다. 전망도 괜찮겠죠.
박평종 ▷ ‘시궁창 같은 전통이어도 전통은 전통이다’는 말이 있죠. 형편없지만 이것마저도 전통이라는 의미이며 이에 대한 극복이 필요하다면 한국사진의 전통과 싸워야지 서구작가와 싸울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장의 논리 역시 장의 바깥에서 문제를 떠들 것이 아니라 안으로 들어와 싸워야 하는 것이죠. 우리 전통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극복방식을 서구에서 끌어올 게 아니라 우리 전통과 정면으로 맞서 싸워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이영준 ▷ 서양과 구분되는 우리만의 사진 전통이 따로 있다고 보시는지?
박평종 ▷ 단적으로 살롱사진과 공모전을 들 수 있겠죠. 물론 일본에서 건너온 것들이지만. 심지어 살롱사진을 극복하기 위해 나온 생활주의 리얼리즘도 공모전 형식을 못 벗어났어요. 공모전이라는 형식은 유지되면서 내용이 살롱사진에서 생활주의 리얼리즘으로 대체되었던 것이죠. 한번은 부르디외가 마네에 관해 강연한 내용을 들은 적이 있는데, 부르디외는 철저히 사회학자 입장에서 접근해 마네의 가족과 지인들의 출신성분만으로 마네를 분석하더군요. 이 분석에 따르면 마네는 완벽한 부르주아 출신으로 나왔는데, 마네는 떨어질지 뻔히 알면서 일부러 살롱전에 계속 작품을 냈잖아요. 나중에 낙선전을 통해 자신의 이름을 알렸고요. 이처럼 자기의 계급의식과 출신성분을 극복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뻔히 알면서 마네는 자기 내면에서 끊임없이 부딪히면서 결국은 해 내지 않았습니까. 지금도 모범적인 사례 중 하나로 전해지고 있어요.
이영준 ▷ 저는 사진을 부정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자신이 배우고 믿는 것 모두를 부정하고 백지에서 시작하라는 거죠. 사진을 하다보면 항상 누구누구와 비슷하다는 혐의에서 벗어나기 힘들고 이 콤플렉스에서 영원히 못 벗어납니다. 학생들에게도 얘기하지만 여기서 벗어나는 길은 최대한 부정하고 망쳐라 이겁니다. 우리가 아는 훌륭한 작가는 모두 망치고 깽판 친 작가지 탑을 잘 쌓으려고 바들바들 떤 작가는 아니거든요. 프린트 질이 어떠하다는 등 사람을 벌벌 떨게 만드는 사진교육에서는 절대 예술이 나올 수 없죠. 예술은 최대한 부정하고 망치는 것에서 나옵니다. 그 대신 사진 아닌 것과 무지막지하게 합종연횡하고 이를 위해 상상력을 발휘해야죠. 여기서 평론도 잠시 언급하자면 저는 평론이 간단한 것을 복잡하게, 복잡한 건 간단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봅니다. 어떤 범주가 있으면 여기에 반대쪽 범주를 끌어다 붙여서 갈등을 일으키고 변증법적으로 뭔가 나타나게 하는 게 평론이라고 봐요. 작가가 내놓은 복잡한 실타래를 대중의 구미에 맞춰 간단히 OO주의라는 타이틀을 붙이기보다는 그 실타래를 더 복잡하게 해야 한다는 말이죠. 이번 논쟁 역시 저의 반론을 통해 박선생님 글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고 보고 만약 더 간단해졌다면 이번 논쟁은 실패한 거라고 봐요.
김우룡 ▶ 획일화되어가는 우리 작가들에 일침을 놓으려는 마음에서 시작된 박선생님의 글에서는 전반에 흐르는 강한 안타까움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또 논쟁의 맞수를 만나 즐거웠다는 이선생님의 말씀도 계셨습니다. 이를 통해 겉핥기식의 비평행위가 속여져나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번 논재의 진행과정에서 두 분이 느낀 소감을 마지막으로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박평종 ▷ 학생 때부터 존경했던 비평가이시면서 스승 같으신 이선생님이 제 글에 답글을 써주셔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사실 비평가들끼리는 상대의 글을 귀찮거나 서로 입장이 다르면 몇 줄 읽다가 그만두는 경우가 많은데 꼼꼼히 읽어주셔서 감사드리며 여기에 조목조목 지적까지 해주신 것은 애정 없이는 힘듭니다. 작가에 이어 사진 전반에 관한 의견을 글로 써볼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때 다시 이선생님이 다른 의견을 주셨으면 합니다.
이영준 ▷ 계속 반론만 하라고요.(웃음) 오늘 이후에도 서로의 견해차는 계속 남을 것 같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생산적으로 끌고나가는 것이겠죠. 너무 성급한 타협보다는 각자의 견해를 더 개발하고 생산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앞으로 더 많은 박선생님의 좋은 글을 기대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정리 이종화기자<월간사진 2007년 12월호>

Mar 10, 2008

0971

왜 존재해야만 하는 것일까?
해결할 수 없는 물음에 지쳐 오늘 하루도 힘겹게 끝을 맺으려든다.
존재에 대한 의무감은 이결낼 수 없을 만큼의
역겨움을 가져다 준다. 이미 끝이 정해져 있는 모든것들에
모든 것을 내던질만큼 가치가 있는 것일까. 자본주의 체제에서 생산과
소비 활동은 당연한 순환과정으로
받아들여져야겠지만, 나에게 있어 순환은 단지 존재의
사유를 단축시키게끔 하는 물질적인 이론에
불과하다.

헤아릴수 없는 날들의 연속상에 몇번씩이나 교차지점을 가로지는
그이는 또 다시 좌절을 안겨다준다.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도 아닐것이고,
저것 또한 적절한 그 무엇이 아니다.
자본이라는 역겨운 순환 과정을 지독히 온 몸으로 막아내려
하면서 역설적으로 행동하는 난 과연 무엇인가.
끝없이 생각하다보면 언젠가 해결 방안이 나타날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는 헛된 기대감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아야한다. 기대란 곧 실망이라는 사실을.

숫자 놀음이 더 이상 싫어지려한다.
무엇을 위해 움직여야하는지 지금은
끝없는 추락만이 존재할 따름이다.

Maximilian Hecker - Help Me

Jan 30, 2008

-1


4982

그들 또한 그러할 것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없다.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결과인 것이다. 지극히 자연스럽게 원래 그랬던 것 처럼
순응하고, 수긍해야 한다.

상처를 입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보이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하지만 그렇지 않다. 겉으로 판단하는 그 무언가와는 다른것이
있다. 역겨워지려하고 있다. 아무렇지 않게 내 뱉은 말들이 얼마나 아픈지.

하루에 아메리카노를 두잔 마시면,
미국인이 될줄 알았나보다.
멍청하다. 카페인 과다 함량으로 잠이 오질 않는다. 말의 앞 뒤를 전혀 알수가 없다.
철학책을 읽는다. 과도하게 지적이고 논리정연한 전개를 보고 있자니
뒤틀려온다. 그 무엇도 다가오지 않는다. 밀어내야 한다. 끝없이 저 끝까지
비난도 동정도 이해도 수긍도 무엇하나 쉽지만은 않다. 시간이 지나면 남는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흘러가는 지금이 있을뿐이다.
이해와 관대함은 흘러간 물과 같다. 언어는 유희와 쾌락 그리고 절망을 안겨다 준다.
완벽한 하루는 없다. 그렇게 되기 위한 노력은 헛수고는 아니다. 미숙할 따름이다.